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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한 뇌병변 중증장애인이 있다. 예순 가까운 나이에 이르러 그는 지금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병원을 전전하며 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그가 그나마 기력이 남아 있어 혼자 살면서 밥을 지어먹을 때 벌어진 얘기다.

어느 늦은 밤 그는 집에 가기 위해 혼자 번잡한 지하철역 구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걷는 게 많이 불편했던 그는 플랫폼으로 내려가면서 계단 옆 손잡이를 붙잡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 내려가니까 길을 비켜달라고 소리쳤다. 지나던 행인들은 군소리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랬는데, 그가 막 겨우 플랫폼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행인 중에서 어떤 청년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장애인이면 다냐면서 불문곡직하고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영문도 모르는 채 아들 연배 되는 청년에게 얼굴 가슴 등을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아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왔고 두 사람은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 밤 장애인의 전화를 받고 나도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에서 사건의 전말을 들은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가해자인 청년에게 왜 이유도 없이 장애인을 때리느냐고 물어봤다. 그 청년이 하는 말, 회사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술을 마셨는데 장애인이 길을 비켜달라며 시끄럽게 떠들어서 순간 화가 나서 때렸다는 것이었다.

이 청년처럼 스트레스를 받아서 장애인을 때렸다는 인간들이 여기 더 있다. 지난 4월 초 서울 성북역 부근 야산에서 지체와 지적 중복장애를 가진 서른다섯 살 문모 씨가 옷이 벌거벗겨진 채 심한 구타를 당해 숨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죄라면 전철 안에서 힘들게 구걸한 돈을 돌려달라고 애걸하며 가해자를 쫓아간 것이 전부인 그를 산으로 끌고 가 때려서 사망에 이르게 한 두 명의 청소년도 살해 이유가 다니던 대학에서 학점이 생각대로 안 나와서, 학교생활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였다.

3월 성남시에서 벌어진 사건은 또 어떤가, 이 사건은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고 있는 듯해서 절로 몸서리치게 만들고 있다.
일단의 청소년들이 한 지적장애 여성을 폭력으로 유린했다. 이불을 뒤집어씌운 채 목검과 쇠파이프 등으로 마구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바늘로 찌르고, 불에 달군 숟가락으로 몸을 지져댔다. 이렇게 집단 폭행을 당한 장애여성이 결국 숨지자, 이들은 아무 죄의식 없이 장애여성을 산에 갖다 묻었다.

그리고 이들이 경찰서에서 밝힌 장애여성 살해의 한 이유는 폭력을 행사할 때 장애여성이 어떻게 나오는지 그 반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다. 장애인 수난사를 전하는 최근의 언론보도는 지적장애 여성을 데리고 다니며 성매매 시킨 혐의로 한 노숙인이 구속되고, 시각장애 여성의 재산을 등쳐먹은 혐의로 한 주거부정 남성을 역시 구속했다는 보도로 이어지고 있다.

자고 나면 또 어떤 장애인 수난사가 펼쳐질지, 심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더 걱정되는 것은 장애인을 상대로 한 범죄가 어느 면으로 보나 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인 청소년들과 노숙인들과 주거부정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바로 강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의 법칙이 약화되기는커녕 갈수록 맹위를 떨치면서 장애인들을 폭력의 희생양으로 제단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작은 바람이 큰 바람을 몰고 오듯이, 작금의 장애인들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는 범죄 양상 이면에서 멀지 않은 미래 장애인들이 처할 사회환경을 예감하게 된다.

지금처럼 우리 사회가 브레이크 없이 강자 독식의 사회로 계속 가면, 과장을 조금 보태 말하면 장애인들이 맞닥뜨릴 사회는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니면 이미 유럽에서 현실화 되고 있는, 극우 세력의 준동으로 인해 외국인과 장애인이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해 숨지는 아비규환의 사회일 것이다.

장애인들이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되지 말고, 바른 사회를 위해 나서고 연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서리쳐지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발언해야 하는 것이다.

글/ 이태곤 기자
Posted by 미싱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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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7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09.05.07 16: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얼마 전 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과 대담을 하면서 인상 깊은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이 위기의 시대에 가난한 장애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동거’를 적극 고려해 보라는 조언이었다.

유 소장의 이어진 말에 따르면, 정부로부터 생계비를 지원 받는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의 경우 장애 수당까지 합쳐 월 평균 50여만 원을 지원받는데, 이 돈으로 혼자 사는 건 힘들지만 생계비를 지원받는 장애인이 둘 이상 같이 모여 살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유 소장의 조언은 현재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의 다수가 혼자 사는 단독 세대주인 점을 고려해 들려준 처방이었다.

이렇게 지금 가난한 장애인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벼랑 끝에 서 있다.
현실을 보면 물가가 너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예를 들어 계란 한 판이 3천원이었다가 5천원으로 올랐다면, 가난한 장애인들의 실질적인 생계비가 그만큼 삭감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기요금 등 공공요금이 인상됐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수입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생계비에 기대 사는 장애인들에게 정부는 그 부족한 생계비를 더 채워주지 않고 있고, 생계비를 더 지원해 줄 의사도 없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쏟아내고 있는 정부의 빈곤층 대책은 철저하게 장애인을 외면하고 있다. 그나마 눈에 띄는 대책도 기초생활수급자 수를 지금보다 조금 더 늘리겠다는데 그치고 있지, 현재 생활고를 겪고 있는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부족한 생계비를 더 지원하겠다는 대책은 없다.

막말로 경제 위기로 중산층이 직장을 잃으면, 대리운전기사·막노동·혹은 식당 일 같은 힘든 일이라도 해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락하고 싶어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노동에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장애인들은 이 위기의 시대에 속수무책으로 내팽개쳐진 상태에 놓여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들이 빈곤의 늪을 빠져나오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는 정부 시각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오히려 빈곤의 늪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장애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도 인정한다.

그러면 이 점을 정부가 알고 있다면, 하다못해 장애수당이라도 몇 만원 인상해 주는 방식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아닌가. 정부가 어떤 대책도 없이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들에게 고통을 분담해야 하니까 지금보다 생활수준을 더 낮추고, 또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알아서 생존의 방법을 찾아 이 위기의 시대를 넘기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아 무책임하다는 지적을 안 할 수 없다.

기초생활수급자 같은 가난한 장애인 문제 외에도, 이 정부 들어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 마련이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다는 정황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수십 년간 골방에 갇혀 있던 중증장애인들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세상 속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자립생활 패러다임에 이어 탈시설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게 먼 과거의 일이 아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 장애인을 위한 시계가 어느 시점에서 딱 멈췄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정부는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없다.

정부는 경제가 위기니까 장애인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다 알고 있듯이 최근의 경제 위기는 과잉생산과 신자유주의 등의 구조적인 문제로 촉발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언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그러면 이 위기 상황 속에서 장애인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내 숨죽이며 경제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다시 가난한 장애인들 문제로 돌아가면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는데, 어쩌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가난한 장애인들은 류 소장 조언대로 살아남기 위해 모여 소규모 시설을 만들던지, 아니면 극단적으로 원치 않지만 계약결혼이라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자꾸만 장애인들이 세상 속 외로운 섬에 덩그러니 내던져지는 것 같아 심각한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글/이태곤 기자
Posted by 미싱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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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말해 2009.01.12 1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원.. 정말 장애인들은 편히 살수 있는 세상은 언제 올가요... ㅠㅠ

  2. almanacka 2012 sverige 2011.12.21 19: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된 것 In some banks, there are a new saving program for children. It's a program without administration fee in charge. And the minimum saldo is fewer. I want to know where to find almanacka 2012 sverige, do you?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

가진 게 많든 적든, 개인적으로 넉넉하든 부족하든 간에, 우리에겐 오랜 기간 익숙했던 일상생활의 틀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불과 365일도 채 지나지 않는 동안, 익숙했던 그 모든 게 불안과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걸 일반 서민 모두가 뼈저리게 체험하는 나날이 숨 가쁘게 이어지고 있다.

정책적으로 내놓는다는 건 전부 다 둑이 터진 이후이고, 이런 정책을 난데없이 왜 펼치는 거냐고 물으면 동문서답이다. 국민들의 눈에는 그게 아니라는 게 뻔히 보이는데, 정책 담당자들의 눈에는 국민들의 착각이고 모든 게 좋은 것이며, 무조건 믿고 맡기면 조만간 다 해결될 거라는 파라다이스의 청사진만 나부끼고 있다.

최고급 수입차를 탄 1%의 안락함은, 중소형 차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99%의 덜컹거림과 그 충격을 느낄 수 없다는 건가. 그런 건 ‘너희들의 불편함’이기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결론인가. ‘가진 자’들을 위한 정권 차원의 감세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시점에서 ‘없는 자’들의 생존권은 어떻게 대안을 확보해야 하는지, 그 시급한 현안을 풀기 위해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류정순 소장을 만나 진솔한 조언을 들어 본다.

   
▲ 류정순 빈곤문제연구소 소장 ⓒ채지민 객원기자
- 바쁜 일정을 지내고 계시는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린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발족한 시기는 언제인가.

우리 연구소는 기초생활보장법 시행과 더불어 출범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0월이다.

- 연구소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과 취지를 먼저 말씀해 달라
솔직히 말해서 다른 연구소나 단체들과는 좀 다르다. 쉽게 표현한다면 ‘등을 떠밀리며’ 만들게 됐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무슨 의미냐 하면, 내가 96년 8월에 최저생계비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게 예상치도 못했던 이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는 거다.

- 바로 이어진 97년의 IMF체제를 의미하는 건가
그렇다. 학위를 받자마자 곧바로 국가부도사태를 맞이하게 됐다.
길거리에는 노숙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너나 할 것 없는 전국의 모든 서민들이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 때가 아니었나. 최저생계비를 전공으로 연구했던 입장에서 확고한 목표가 세워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기초생활보장법을 만들어야겠다.’ 정말 대안도 없이 모두가 어려워 신음하던 시절이었기에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운동을 할 때, 그 운동에 처음이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 그 운동은 어떻게 진행됐고, 어떤 면면들이 참여를 했나
개혁을 위해 힘쓰던 여러 교수님과 변호사님 들이 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위해 정말 많은 활동과 노력을 했다. 그 분들은 주로 상층부 운동을 담당했다. 다시 말해서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정부의 각 기관 관리들을 만나 설득하는 작업을 전담했다는 거다.
나는 당시 시간강사로 일하던 시절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좀 있었다. 그래서 아래로부터 시민단체들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담당했다.

- 당시 전체 시민단체 차원의 노력이 진행됐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어떤 해답이 나오게 됐나.
우리의 노력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정말 고맙게도 사회복지사협회에서 사회복지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후원금 5백만 원을 우리에게 지원해 줬다.
당시가 어떤 시절인가. 국가부도상태가 아니었던가. 그 고마운 후원금으로 우리는 팸플릿을 만들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생활보호제도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면 이렇게 제도 차원의 생활이 좋아진다는 점을 전국을 누비면서 설득하고 다녔다.

- 어려울 때는 자신도 어려운 이들이 도움을 준다는 게 맞는 말이다. 전국을 도는 활동은 어떤 결실을 맺었나.
지방 각 지역을 일일이 돌며 이 제도 추진의 취지를 강조하고 다니니까, 전국의 거의 모든 단체들이 기초생활연대회의 멤버로 가입을 하게 됐다. 거기에서 힘을 많이 얻었다. 그래서 법이 제정되고 법 시행이 될 무렵, 다시 한 번 더 전국 각지를 도는 발품의 나날을 이어갔다.

- 전국 각지의 서민들 의견은 어땠는가.
전국순회의 과정 전부가 상담의 연속이었다.
‘당신은 해당이 안 될 것 같다.’, ‘당신은 30만 원 정도 받게 될 것 같다.’는 식으로 상담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신청서를 쓸 무렵에는 이 가난한 사람들 모두가 수능시험을 본 학생들보다 더 초조하게 되어버렸다. 실제로 궁금한 걸 누구한테 묻겠는가. 또한 그 궁금증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모두가 다 당장의 시급한 현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상담 문의는 일일이 다 옮길 방법조차 없는 내용들뿐이었다. 구구절절 절박한 사연들을 그들은 묻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쉬웠던 건 전국에서 문의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 나 혼자였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최저생계비제도의 실제 내용을 알고 있던 사람이 소장님 말고는 없었다는 의미인가.
거의 그랬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법과 제도의 윤곽을 알고, 일부분은 제도를 만드는 데 직접 참여도 했기 때문이다.

-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빈곤문제연구소라는 타이틀은 언제 달게 된 것인가.
약간의 부연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다. 2000년 10월에 그 법이 시행되는데, 계속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연락이 폭주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당시까지 내게 휴대전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문의하려는 사람들은 내가 집에 있어야 상담이 가능해지는 게 아닌가. 낮에는 개인 일정 때문에 나가야 하고 학교 강의도 해야 하고, 아침저녁 할 것 없이 전화가 계속 오는데 감당을 못할 정도였다.

- 집안에서 활동을 하기가 일면 난감했을 것 같다. 어땠는가.
집안에서 불평이 터져 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기껏 10년 동안 공부를 시켜서 박사까지 만들어놓았는데, 돈도 못 벌고 집안에 앉아 남들의 ‘고민덩어리(?)’ 얘기로 가족들 밤잠도 못 자게 만든다는 반(半)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가족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었다.

- 계속 집안에서 상담 활동을 계속했던 건가.
그런 와중이던 시점에, 개미마을이라 불리던 서울 문정동의 비닐하우스촌 소송 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개미마을에서 활동하시던 어느 목사님께서, 자신의 교회 방 하나를 내줄 테니 거기에서 전화를 놓고 상담도 하라며 큰 도움을 전해 주셨다. 그래서 좁은 사무실 공간이었지만, 그 자리에 모 시민연대와 우리가 함께 들어가서 ‘기초생활보장’이라는 시급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 그 시점이 정확하게 언제인가.
‘한국빈곤문제연구소’라는 정식 간판을 걸고, 연구소 이름과 틀을 갖춰서 발족을 한 건 2001년 6월이다. 그때 공식적으로 창립식을 하면서 출범하게 됐다.

- 개인적인 사항을 묻겠다. 연구소 출범 이전, 더 멀리 올라가서 기초생활보장법을 준비하기 이전에는 빈곤문제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3자의 입장으로 머무셨는지가 궁금하다.
당시의 나는 그냥 집에 있는 주부였다. 이해가 잘 안 가시겠지만, 나의 학부 전공은 패션디자인이다. 학교 졸업 후엔 패션 관련 일을 했고, 20대 시절에는 싱가포르 에어라인에서도 근무를 했었다. 그런 후 아이를 낳고 집에 들어와 지내다가, 모(某) 패션기업 임원으로 근무하던 남편이 뉴욕지사 담당으로 나가게 돼서, 따라 나간 김에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됐던 거다.

-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나.
처음엔 노인복지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학교에 가서 상담을 했는데, 노인복지는 현장실습을 특히 많이 해야 한다고 하더라. 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있는 입장인데, 밖으로 돌며 실습학점을 다 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MBA 경영대학원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소비경제를 중심으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 그것이 최저생계비 계측하고 연관이 있는 건가.
어차피 소비문제니까 마찬가지다. 가계부 분석이 바로 최저생계비 연구인 것이다.

- 정리한다면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가, 최저생계비를 연구하면서 빈곤문제에 발을 들여놓으셨다는 의미인가.
그 많은 분야들 중에서 왜 하필 최저생계비를 계측했느냐가 화두인데, 우리 지도교수님은 우리를 ‘만족불만족학파’라고 불렀다. 소비자의 만족과 불만족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경제학 분야인데, 내가 패션 관련 일을 하며 경제적 여유가 있던 사람들을 두루 접했던 경험이 결과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됐다.

그 다음에 소비경제를 하면서, 가장 아래의 계층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사회 시스템과 경제 메커니즘이 돌아가는 구조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니까,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중요한 시장에 실패하는 부분이 있고 시장 결함도 있으며, 거기에 대해서 정부가 개입해서 바로 잡아줘야 할 부분들이 유독 눈에 많이 보였다. 특히 자본주의경제라는 게 힘 있는 사람들의 편이 아닌가. 힘 있는 재벌들이 정권과 결탁하면, 소비자로서 소비시장에 끼지도 못하고 유효수효에서 배제당하는 빈곤층 문제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 ⓒ채지민 객원기자
- 빈곤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 됐다는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만족불만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구매력이 없어 소비자 축에도 들지 못하는, 소비시장에 참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원초적으로 불만족한 소비자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 사람들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열악한 이들을 위해 최저생계비를 어떻게 실행하고 제도화해야 하는지가 나의 과제가 된 것이다.

단순한 예를 들어 본다. 1989년 기준으로 최저생계비는 전체평균소득의 45%였다. 지금은 30%이다. 무려 15%나 떨어진 거다. 그래서 지금 정부 정책이 5공 시절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다.

-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질문하겠다. 법 제정 이후로 법 평가에 대한 이런저런 이견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시는가.
그 법이 타협안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는 어쨌든 법이 통과는 돼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근로능력자한테 최저생계비를 주면 소위 ‘복지병’이 생긴다며, 무조건 줄 수는 없다는 게 정치권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건부수급으로 하자고 일종의 타협을 했던 거다.

인권의 개념으로 본다면 스웨덴과 독일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웨덴과 독일에서는 근로능력자가 일을 하기 싫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계보장만 받고 살겠다며, 그런 권리주장을 내세워서 헌법소원 끝에 이겼던 바 있다. 인권의 개념을 제대로 해석한다면, 일을 하지 않고 최소한만 유지하며 살겠다는 의견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게 맞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그걸 도입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활사업을 통한 조건부수급으로 가자는 결론을 내린 거다.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회에서 일자리를 주고,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자활사업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 이 법의 토대가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만든 건가. 아니면 외국의 어떤 법을 가지고 와서 만든 건가.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보장은 영국의 베버리지보고서로부터 시작한다. 시장바구니 방식으로 절대빈곤을 계측하는 방식은 그 보고서가 나왔던 20세기 중반 사회권(權)으로써의 생명보장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다른 나라들은 절대빈곤이 아닌 상대빈곤으로 정책을 다 바꿔갔다. 아직까지 절대빈곤으로 시장바구니의 최저생계비를 계측하는 건 후진국들뿐이다.

- 우리나라도 그렇다는 건가.
그렇다. 다른 나라들은 진작 다 상대적 빈곤으로 방식을 바꿨다. 그런 면에서 보면 미국은 우리보다 더 후진국인 셈이다. 미국의 계측방식은 식품비 한 가지만을 기준으로 한다. 그래도 다른 나라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최저생계비 안에는 적어도 기초화장품 비용은 들어 있다. 최소한도로 필요한 로션이나 비누 등의 지출내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다.

그런데 미국은 최저생계비 계측을 먹는 것으로만 계산해서, 거기에 곱하기 3으로 정한다. 그래서 엥겔계수를 33%로 고정시켜놓았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엥겔계수가 낮아지지 않은가. 저소득층의 자활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게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이다.

-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기초생활보장법이 예전의 생활보호법에 비한다면 획기적인 발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기초생활보장법이 도입된 이후로 근로무능력자들, 특히 장애인들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혜택을 받게 됐다. 물론 ‘예전에 비해서’라는 단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요즘은 장애인들이 실내에 머무르지 않고 자립생활센터 같은 매개체를 이용하며, 혼자 살기 위해 나오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가. 적어도 최소한의 기초적인 생활은 정부에서 받는 생계비로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그 금액이 너무 낮지 않은가.
서울을 기준으로 볼 때, 많이 받는 경우는 월 38만원을 받는다. 거기에 중증장애일 경우 장애수당이 16만원 더해진다. 50만원 내외의 생계비를 확보할 수 있기에 최소한의 생계는 된다. 물론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몇이 모여서 함께 지내는 방법을 택하는 거다. 가장 기초적인 생활이 가능한 선에서 말이다.

- 그 법이 제정된 지 8년 정도 됐다. 지금 와서 평가한다면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빈곤탈출의 계기가 됐다고 보는가.
기여를 했다 안 했다는 판단보다 훨씬 더 심각한 대목이 있다. 바로 비수급 빈곤층이 훨씬 많아졌다는 점이다.
실제 빈곤층이 몇이든 간에 예산에 맞춰 숫자를 일률적으로 자르도록 방침을 정해놓았다. 얼마나 엄격하게 지침을 적용하느냐 하는 것도 주관적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가장 많이 받는 게 38만원이라 할 때, 적어도 20만원은 우선적으로 월세로 지출이 된다. 그렇다면 남는 18만원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30일 기준으로는 그 비용으로 도저히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식사는 무료급식을 찾아가서 먹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료급식이라는 것 또한 어쨌든 간에 사회적으로 현물지원을 받는 것이 된다. 물론 지금은 이것마저 불가능하게 경제가 돌아가고 있지만, 이런 것까지 모두 조사해서 구분한다면 대부분이 부정수급자가 되어버린다.

- 조금의 수입이라도 생기면 부정수급자로 처리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다른 예로 재활쓰레기의 파지(破紙)나 폐지(廢紙)를 모아 근근이 생계비를 마련하는 것도 부정수급자로 분류가 된다. 수입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이다. 그럼 그들이 왜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종이를 모아야 하는가. 최저생계비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까다롭게 부정수급자들을 조사한다면, 그래서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고 전체 예산 규모마저 삭감한다고 하는 건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를 묻게 만든다. 어려운 상황의 국민들도 최소한의 생존은 하게 만들어 줘야지, 살지 못하게 만드는 건 제대로 된 정부가 아니라는 거다.

- 그럼 이번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복지 분야에 줄어든 예산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나.
내년도 예산을 보면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는 2008년보다 1만 명이 축소되고, 의료급여 1만3천명 축소, 난방비지원 316억 원 전액이 삭감되고, 겨울철 난방을 위한 에너지보조금 489억 원 삭감, 장애수당 아동수당이 7만 명 축소된다.

지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해서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정부안 내용이라는 게 이것이다. 이렇게 복지예산을 확 줄여버리는 데 대해 우리가 예산삭감저지투쟁위원회 등을 만들어 기자회견을 하고 적극적으로 투쟁하겠다고 했더니, 예산을 조정하는 척하며 아주 조금만 올려줬다.

그런데 아주 조금 올린 그 내용만 신문에 대서특필 되더라. 그 이전에 확 줄여버린 건 어느 신문에도 안 나왔다. 눈곱만큼 올린 것만 신문에 등장하다 보니, 일반 서민들이 볼 때는 정부가 복지예산을 증액하며 좋은 일을 한 것처럼 보이는 거다. 이게 무슨 언론인가. 확 줄인 건 눈을 감고, 줄인 것에서 살짝 올린 것만 나팔을 부는 게 제대로 된 언론인가.

   
▲ ⓒ채지민 객원기자
- 지금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 보시는가.
당연히 감세 문제이다. 지금 일선 현장에 돈이 어디 있는가. 지방으로 보내는 교부세, 그것이 복지지원이다. 그걸로 복지와 교육에 쓰는데, 그 지방교부세를 확 낮춰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방에선 돈이 없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놓은 거다.

- 그럼 지금부터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 건가.
예산이 확 줄어든다는 것은 복지예산지출이 가장 우선적으로 줄어든다는 말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장선거에 들어간다면, 표가 될 만한 곳에만 예산이 가게 될 것이다. 그 지역마다, 특히 강남구 같은 경우 비닐하우스촌의 가난한 사람들은 주민등록등재를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뒤집어 본다면 그들은 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열외가 된다는 거다. 가진 자들에게 10만원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열악한 환경에 있는 이들한테는 생존을 가능케 하는 큰돈이 아닌가.

- 예산이 선거를 의식하며 선별적으로 쓰인다는 게 사실인가.
표가 될 만한 곳에 예산이 들어간다는 아주 간단한 실례(實例)가 있다.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 단지의 경우 최소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사는 곳 아닌가. 그런데 이 지역의 노인정에 월 200만원씩 점심값이 지원된다.

중산층이 아니라 준(準)상류층 지역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10억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노인정에 와서 지내는 분들이라면 일단 잘 사는 입장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 분들을 위해 구청에서 200만원씩 지원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표면상으로는 노인복지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며느리복지를 위한 예산지출인 거다. 점심은 노인정에서 다 해결이 되니까 30~40대 여성 주민들이 집에 와서 어르신들 밥을 안 차려도 된다. 아줌마들의 여유를 보장해 준다는 건 바로 표를 전제로 한 선심공세인 것이다.

- 그게 실제상황이라면 정말 크게 잘못된 예산집행이 아닌가.
그런데 우스운 일이 뭔지 아는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노인정에서 양질의 급식이 가능하게 만들어놓았지만, 제3자가 식사를 하러 가면 절대로 밥을 주지 않는다는 거다. 근처에 사는 가난한 노인네가 가서 같이 먹자고 하면, 무조건 출입금지로 배제가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특정한 시기마다 깨끗한 보도블록을 갈아치우고 멀쩡한 가로등을 새것으로 바꿔대면서도, 실제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배려는 눈을 감는다는 거다. 운동시설 같은 것도 어려운 이들의 재활을 위해 설치되는 적이 있나. 다들 그럴싸하게 눈에 띄는 곳에다가 중산층이 즐길 만한 시설로 갖춰놓고 주민자치센터에 무슨무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모든 게 어려운 이들이 아닌 실제 표로 연결 가능한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예산이 써지고 있는 것이다. 지방행정은 100% 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 감세정책 시행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뭔지 아는가. 향후 해마다 감세가 더 많이 되는 구조로 만들어놨다는 거다. 2008년에 1조9천억이 감소이다. 그 다음 내년 2009년에는 8조1천억 원이 줄어들게 되어 있다. 1년 사이에 4배나 더 감세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2010년에는 18조원이 줄어든다. 1년 사이에 10조가 더 줄어드는 거다. 그 다음에 20조 내외 수준에서 계속 줄어들게 만들어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수치자료는 헌재의 종부세 판결 이전에 나온 것이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지금 당장 천문학적인 액수가 가진 자들의 주머니로 쏟아져들어갈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 액수만큼 감세 폭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 불과 1년도 안 된 사이에 모든 전망이 암울한 내용으로만 채워진다는 게 상식 밖의 일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이 이대로 붕괴된다고 할 때,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대로 감세를 추진하고 이런 식으로 복지를 축소하면 점점 더 심해지고 빈민들은 양산이 될 텐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계속 밀어붙인다면… 솔직히 현 정부의 후반부를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불황이 심해지고 약자들의 처우가 열악해진다면, 앞으로 감세는 하더라도 복지예산축소를 일방적으로 크게 하지는 못할 거라 예상한다.

- 그렇게 예상하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럴 경우 그 재원은 어디에서 가져오는 것인가.
그게 바로 재정적자이다. 일본이나 미국보다는 우리나라의 재정이 비교적 건전한 편이다. IMF 이후 지난 정부들이 재정을 건실하게 유지시켜 왔기 때문에, 현재의 재정적자 폭은 크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미국과 일본식으로 우리도 재정적자가 많이 나는 정책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면, 그때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위험이 아주 크다.

장기적으로는 굉장히 안 좋은 정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의 안전을 위해서는 피하기 힘든 유혹이 아닌가.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할까 봐 크게 걱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런 방식으로 갈 거라는 징조가 이미 보이고 있다.

재정적자가 무엇인가. 겉으로는 번듯한 집에 살고 있는 거지만, 내용은 전부 다 빚을 끌어들여 포장했다는 얘기 아닌가. 다음 정부에 빚을 떠넘기고 지금 당장의 문제는 덮어두자는 거다. 복지예산을 축소하며 국가를 운영한다는 건 당장 자신들의 눈에는 불필요한 비용의 축소라고 믿어질지 모르지만, 몇 년 후에 몇 십 배 이상의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 가혹한 후폭풍이 엄연히 남게 되는 것이다.

- 빈곤층의 실태와 그 규모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가.
지난 10년 동안 중산층이 10% 줄었다. 그 중에서 7%가 빈곤층으로 내려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5천만 인구로 계산해서 7%는 얼마인가. 350만이다. 그만큼 빈곤인구가 더 생겨난 건데도, 기초생활수급자는 150만 명으로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지금 실업률이 몇 %라고 아직은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진정 심각한 것은 청년실업률이다. 가시적으로는 8%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수치보다 훨씬 더 높을 게 확실하다. 청년실업률이 높다는 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 실업이 장기실업으로 진행되고, 자칫 잘못하면 평생실업으로 고착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청년실업자 구제를 위한 정책들이 여전히 약하고 미진한 것 같다.

- IMF 당시와 지금의 경제위기 차이점은 무엇이라 보시는가.
아직은 위기가 아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불황의 매서운 한파가 시작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옮겨와서 실물경제가 안 돌아가게 되면, 중소기업들과 영세자영업자들의 줄도산이 이어지게 된다. 가정 붕괴와 실업자 대량양산이 가시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면, 그 시점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심각한 상태가 된다.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하루빨리 철저하게 수립해야 하는데, 실제 현실을 전혀 모르는 한가로운 낙관론이 정부쪽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IMF 당시는 우리만 위기였지 않은가. 환율이 날뛰고 이자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해도, 우리나라는 경쟁력을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환란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의 주력 수출시장인 선진국들이 전부 다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이 수렁에서 벗어날 방법이 어지간해선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도 조만간에 세계 7대 강국으로 올라갈 거라느니, 내년 4% 성장이 가능할 거라는 속편한 낙관론 타령만 반복이 된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정부인가. 모든 게 구멍투성이다.

- 실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연구소에 주로 들어오는 상담 내용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건 지난 밤사이에 들어왔던 기초생활보장에 관한 인터넷 상담의 답을 쓰는 일이다. 답을 쓰고 나서 출근을 하는데, 그 사연들을 읽는다는 건 가슴을 찢는 것과 마찬가지의 고통이다. 대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이혼을 하면 수급을 받는 게 가능해지는지, 전월세 보증금 다 까먹고 길거리에 나앉았는데 이 추위에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거기에다가 자영업을 하다 망했는데 오갈 데 없이 아무런 대책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연이 요즘 특히 많이 올라오는 것 같다. 삶의 벼랑 끝에서 애타게 구조신호를 보내는 이들의 절규인 셈이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상담이랄까, 그런 게 있으신가.
기억에 남는 상담의뢰인들은 대체로 사회적 분노에 가득 찼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나 숭례문방화사건 같은 일을 지금 당장이라도 저지를 기세로 분노를 토로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담은 실질적 대안을 찾는 상담도 많지만, 심리적 치료로 진행되는 상담 또한 많이 있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은 월남전 고엽제 환자 분의 얘기였다. 학교 다닐 때는 자기 동네에서 가장 촉망 받고 성공할 사람으로 인정받았었는데,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온 몸이 엉망으로 망가졌다고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돈다운 돈을 벌지 못해 효도마저 못했었는데, 그 환자분한테 파킨슨씨병이 찾아왔다고 한다. 결혼도 못하고 이제는 자기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 돼서, 인생 후반기에 또다시 노부모의 신세를 져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그의 절규가 잊어지지 않는다.

이 나이가 되어 왜 나한테만 불운이 오고 장애가 찾아오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히 잘 먹고 잘 살며 잘 다니고 있는데, 너무 억울해서 도저히 혼자선 절대로 못 죽겠다며, 극도의 분노에 찬 상태에서 긴 전화통화를 나눴다.

- 모든 게 가슴 아픈 현실로만 채워진다는 게 안타깝다. 소중한 말씀을 전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마무리 차원에서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지향하는 앞으로의 목표나 당면과제를 말씀해 달라.
우리 연구소에서 가장 크게 하는 일은 연구와 상담, 상담교육과 복지제도개선운동이다. 상담은 복지제도개선운동을 위해서 필요한 자료수립의 과정이고, 연구의 최종목적 역시 제도개선에 맞춰져 있다. 지난 국민의 정부 때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는 제도가 크게 훼손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연구소가 처한 가장 큰 당면과제는, 앞으로 훼손될 게 분명한 이 제도를 방어해내는 게 최대 주안점이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우리가 공세적으로 나갔었다. 이걸 고쳐라, 이걸 개선해라 하며 계속 운동해 왔는데, 이제는 제도 훼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수세에 몰리면서 지금 있는 것마저도 방어하기 힘들어질지 모른다.

일단 지금 당장 예산부터 깎였기에, 벌써 많은 장애인들이 여의도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 겨울 내내 농성을 계속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우리는 감세를 못 막지 않았나. 게다가 헌재에서 부자들에게 그동안 낸 세금을 그대로 다 토해 준다고 하는데, 사회적 약자인 서민과 빈곤층들은 이런 정부와 정책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생존권 차원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토론해야 할 것이다.

사회 개혁이나 변화의 차원이 아니다. 이젠 생존권의 마지막 벼랑 끝에서, 생사를 선택해야 할 기로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글/이태곤 기자
Posted by 미싱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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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발표한 내년 경제성장률은 3.3%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으로 내걸었던 경제성장률 7%의 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거기다 주가폭락에 유가폭등, 환율은 1달러당 1,500원까지 올랐고, 서민들은 제2의 IMF를 체감하고 있다. 그들은 “오르지 않은 건 월급밖에 없다.”며 지갑을 꼭꼭 닫았다.

꼭꼭 닫힌 게 어디 지갑뿐이랴. 그나마 최소한의 의식주는 보장받은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현실에,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은 추워진 날씨에 웅크린 몸만큼 마음도 닫힌 채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올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빈곤 장애인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서울역 구역사 앞에서 얇은 이불을 덮은 채 잠이 들어 있는 한 장애인의 모습 ⓒ 김태현 기자


일자리 없다면 기초생활수급권이라도


우선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빈민문제연구소 같은 기관들을 대상으로 요즘 장애인들이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한결같이 장애인들의 상담 요청이 예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고 이야기했다. 대신 의뢰하는 상담주제는 예전에 비해 양상이 바뀌었다고.

예전에 장애인들이 상담기관의 문을 두드리면서 물어보는 주제는 주로 ‘내가 몇 급 장애인인데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경기침체를 반영해서인지 ‘내가 장애인인데 어떻게 하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느냐?’는 문의가 상담 건수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게 장애인 상담기관과 단체 관계자들의 말이었다.

경기 침체로 직장을 구하는 게 어려워지면서 정부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려는 장애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상담기관 관계자들은 장애인들이 직장을 구하는 것도 힘들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그나마 직장에 다니던 장애인들마저 실직하게 되고, 실직 장애인들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하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는지 문의하는 장애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주거문제도 가난한 장애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로, 소득이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값싼 공공임대주택으로 옮겨가고 싶은데, 자격이 되는지 문의하는 장애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게 상담기관 관계자들의 말이었다.

높아지는 물가, 줄어드는 후원, 대책 없는 복지

장애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기초생활수급자 재가장애인들일 것이다. 그런 장애인의 사정을 가장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복지관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자 서울의 S복지관 외 여러 복지관을 대상으로 실태를 알아봤다.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후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애인들은 늘어나는데, 한 번씩 목돈으로 들어오던 후원금도 요즘은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장애인 개인이 복지관과 정기적으로 결연을 맺은 후원자까지 후원을 중단하고 있어서, 도움을 주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는 입장을 밝혔다.
돈 뿐만 아니라 후원물품 또한 많이 줄어들어서 장애인들에게 제공하던 점심도시락 제공 서비스 같은 경우 대상자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복지관측은 물가는 자꾸 오르는데 기초생활수급비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힘들어진 상황이라고 장애인들의 실상을 전했다.

게다가 요즘같이 날씨가 추워지면 난방비를 아끼려고 추운 방 안에서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 지내다 병을 더 키우는 장애인들이 많다고 한다.
복지관 관계자는 복지관에서 지원한 기름보일러는 폭등한 유가로 인해 함부로 켜 볼 엄두를 내지 못해 무용지물이 됐다고 울상을 지었다.

또 심각한 것은 의료비 문제였다. 국가에서 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장애인라도 꼭 필요한 치료비에는 많이 부족한 실정.
게다가 기본적인 진료 외에는 지원이 되지 않는 검사비 등이 포함되는 제한이 있어 다른 기업복지재단 쪽에 지원 요청을 하는데, 그마저도 바로 도움을 받기는 어렵단다.

한 복지관담당자가 전해준 사례에 따르면 어느 60대 장애인 부부는 부인이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경제활동이 가능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 했다고. 또 근육장애로 지체장애를 가진 아버지에게서 유전으로 장애를 물려받은 자녀도, 국가에서 지원되지 않는 엠알아이(MRI)검사나 의료보호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비싼 의약품을 구입할 수 없어 사실상 치료를 못 받고 있다고 한다. 5명의 어린 자녀를 둔 한 뇌병변 장애여성은 백혈병까지 겹쳐 고생하면서도 수술비를 구하지 못해 병을 더 키우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례도 있었다.

또 장애가 있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학비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복지관 담당자들 전언이다. 대학등록금이 부족해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어렵게 빚을 냈다며 어려움을 토로하는 장애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청량리 지하도에서 만난 노숙 장애인 ⓒ김태현 기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기초생활수급자의 60% 이상이 1인 가구라는 것이다.
장애인의 특성상 독거 장애인들이 기초생활수급자에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생계비는 최대한 많이 받아야 월 35만 원 정도. 장애인 수당을 받는 장애인들은 생계비에다 수당을 더해 월 50만 원 정도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장애 급수가 낮아 월 2만원의 장애 수당밖에 지원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은 최대한 지원받을 수 있는 돈이 월 40만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거비와 통신비를 내고 나면, 그야말로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다는 게 복지관 관계자들이 전하는 빈곤 장애인들 실태였다.

장애인들이 대거 수용되어 있는 생활시설의 경우는 어떨까.
지역에 있는 몇몇 생활시설들의 경우는 두세 달째 후원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정부보조금 외에 난방비는 후원금으로 해결해 왔는데, 후원금이 끊겨 어떻게 겨울을 나야할지 막막하다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고용, 경기침체로 두 번째 위기 겪어

경기침체가 가속화 되면서 고통을 받기는 고용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 고용을 알선하고 있는 기관과 단체 관계자들은 장애인 고용이 예전에 고용장려금 축소로 한 번 위기를 맞았는데, 지금 경기 침체로 두 번째 위기를 맞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취업해 있는 장애인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장애인들이 다수 취업해 있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한 반도체 회사의 경우, 삼성전자의 하청을 받는데 이번 달 삼성전자에서 발주하는 원청 물량이 끊겼다고. 이런 상황이라 이미 고용되어 있는 장애인근로자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고용알선 기관 관계자의 말이었다.

장애인 고용 알선 단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또 하나 힘든 것은, 고용장려금 지원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나마 그동안 장애인 고용에 적극적이었던 영세 사업장도 장애인 대신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 어느새 사업장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리 잡고 있어 장애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졌다고 한다.

또 이런 상황이지만 취업을 원하는 장애인들은 대부분 단순 사무직을 원하는데, 장애인을 사무직종에 고용하려는 사업장은 드물기 때문에 장애인 고용이 힘들다는 이야기도 고용알선 기관과 단체관계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노숙장애인, 갈 곳이 없다

그러면 거리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어떨까.
노숙장애인들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11월 19일,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11도. 올 들어 가장 춥겠다는 일기예보가 있던 날, 낮 12시경 청량리를 찾았다. 청량리역 부근 굴다리에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길게 줄 서 있었다. 그 줄은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인 ‘밥퍼’까지 이어진다.

이 사람들은 왜, 언제부터 갈 곳 없는 노숙인이 되어 이 줄에 서 있게 된 것일까.
‘밥퍼’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노숙인 중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을 발견하고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건넸더니, 의외로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해 마흔 여덟이라는 그 남성은 28년 전 골수암으로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사용 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팔까지 마비가 와 장애 등록을 하고 기초생활수급권을 신청해서 받았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2년 간 교도소에 복역하게 돼 수급권이 박탈되어 못 받게 됐다고 했다. 게다가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가족들과의 갈등으로 집을 나와 시설과 재활원을 전전했는데, 시설 내의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들의 후원을 받지 못해 더 이상 지내기 어려워져 나와서 길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일상은 간단하다. ‘밥퍼’에서 아침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오후엔 근처 제기동에 있는 ‘작은예수회’가 운영하는 급식소에서 밥을 먹고, 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밤이 되면 근처 숲 속에 천막을 치고 자는 게 전부.

술은 마시지 않고, 가끔 구걸로 볼펜 등을 팔기도 하지만 겨울엔 장사가 되지 않아 하지 않는단다. 그래도 근처에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아 끼니 걱정도 없고, 노숙인 상담센터에서 연결해준 근처 시립병원에서 무료로 약을 탈 수도 있단다.

제기역 근처 무료 급식소. 노숙인을 비롯해 한끼를 해결하려는 이들이 길게 줄서 있다. ⓒ 김태현 기자


기초생활수급권을 다시 신청하지 그랬냐는 질문에 그는 “주거지는 근처 교회 목사님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이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게을러진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노숙생활을 ‘유랑’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 있겠지만, 그 곳에 있던 많은 노숙인들은 그렇게 삶에 체념한 듯 보였다. 그들도 한때는 열심히 살아보려 애쓰던 사람들일 텐데, 무엇이 그 끈을 놓게 만들었을까.

발길을 옮겨 지하철 제기역 근처에 있는 ‘작은 예수회 소망의 집’ 급식소를 찾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시간이었지만 이 곳 또한 급식소 앞에 노숙인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좁은 실내에 식탁이 늘어져있고, 따듯한 밥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줄서있던 노숙인들이 들어와 다함께 성호경을 긋고 기도를 한 후 밥을 먹는다.

천주교에서 후원을 받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인 ‘작은 예수회 소망의 집’의 오성근 소장은 이곳을 찾는 하루 평균 500명 이상의 노숙인들 중에는 사실 집이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귀띔했다. 그런 걸 알아도 어차피 어려운 사정은 마찬가지일 테니 맘 편히 식사할 수 있게 배려한다는 것.

오 소장에게 이곳을 찾는 장애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더니, 장애인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들이 많다고 한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매일 오는 장애여성도 네댓 명 정도 있다고.

‘소망의 집’에서는 식사를 하러 오는 노숙인들에게 꼭 2백 원씩 받고 있다고 한다.
2백 원씩 받는다고 급식소 운영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마는, 어차피 이곳은 천주교에서 나온 사람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일하기 때문에 인건비는 걱정 없고 각 교구 소속 성당이나 기업 등에서 적게나마 후원을 받기 때문에, 운영은 어려워도 돈을 벌고자 함이 아닌 그들의 ‘자존감’을 일깨우려는 의도로 조금이라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이런 도움에만 익숙해져 스스로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뜻. 그는 덧붙여 “급식소를 쉬는 날은 아예 끼니를 굶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목요일)도 마음이 편치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급식소를 나오는 길에,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한 노숙 장애인을 만났다. 유난히 어깨를 움츠린 그 장애 남성은 조심스레 사연을 묻는 기자에게 “묻지 말라.”는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무심한 듯 한 표정과 눈빛에서 처연함이 느껴져 기자도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남자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정신장애 3급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가족들이 자신을 책임 못 지겠다며 한 교회 쉼터로 보내 그곳에서 7년을 살았지만, 적응하지 못해 결국 나오게 됐다.

길거리에서 자며 건축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힌 그는 거처 주소가 없어서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기자에게 주소를 마련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말없이 자리를 떴다.

청량리 역 부근 무료급식소에 줄 서 있는 노숙인들 ⓒ김태현 기자


시설에서 나와 시설로 돌아간다?


서울역으로 자리를 옮겨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상담소를 찾았다.
그곳에서는 찾아오는 노숙인들을 쉼터와 연결시켜주어 일을 찾고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컨테이너박스 3개를 길게 붙여놓은 그 곳을 찾아오는 노숙인들은 잠깐 쉬어가는 이들까지 합해 하루 평균 40~50명, 걸려오는 전화도 하루 평균 10통 이상이라고 한다.

상담직원들이 추정하는 서울역 부근 노숙인만 해도 거리 노숙, 쪽방·피시방 등 비주거공간 노숙인까지 합하면 200명 이상. 요즘 경기불황이 찾아오면서 초기 노숙인들이 늘어난 걸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노숙 장애인들의 비율은 10% 미만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게 상담원의 말이었다.

그러나 눈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경증장애를 가진 이들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상담원들이 외부로 나가서 상담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동권에 제약을 받는 노숙장애인들이 더 있을 수 있다고.

게다가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때문에 거리를 배회하던 노숙인들이 보이지 않는다며, 눈에 띠어야 도움이라도 줄 텐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어 더 걱정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간 서울지하철 숙대입구 역 근처에 있는 ‘다시서기센터’ 본부에서 현장지원팀의 이형운 팀장의 입을 통해 노숙 장애인들의 실태를 알 수 있었다.
노숙인들은 보통 거리노숙인, 시설노숙인, 비주거공간(쪽방, 피시방 등) 노숙인으로 나뉘는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거나 일용직 노동을 하며 고시원에서 지내는 노숙인도 많지만, 노동을 할 수 없거나 기초생활수급비조차 받을 수 없는 노숙장애인들은 높은 가격(월 25만원 이상)때문에 아예 주거공간을 포기하고 나와 길에서 지내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고시원들이 1층에 있지 않고 장애인 편의시설이 미흡한 것도 장애 노숙인이 주거공간을 포기한 큰 이유 중에 하나.

그리고 이 팀장이 전하는 한 사례에 따르면, 요즘은 전동휠체어를 탄 노숙장애인들이 눈에 띄고 있는데,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하철 안이 따뜻하기 때문에 대개 지하철 객차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돌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용변 처리를 못해 똥기저귀를 찬 채 이틀을 지낸 장애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문제는 ‘다시서기센터’에서 연결해주는 노숙쉼터에서 지내는 노숙인들은 보통 일용직 노동일을 나가는데, 장애인들은 일하기 어려우므로 쉼터에서도 반기지 않고 장애인들도 가기 꺼려해 연결해주기 힘들다는 게 이 팀장 말이다.

또 알콜중독이나 기타 정신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쉼터는 있지만 일반적인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전용 쉼터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결국 충북 음성 꽃동네 등의 대형 시설로 보내는 방법밖에 없단다.

그러나 오랜 가난을 겪으며 산 장애인들이 갑갑하고 열악한 시설로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에 이 팀장은 현장에 나가 거리에 있는 장애노숙인들을 만나 설득하는 게 어렵다는 고초를 털어놨다.

이 팀장은 노숙장애인들을 시설로 보내는 것이 최선책이 아닌 것은 알지만 점점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행여 얼어 죽기라도 할까봐 같이 가자고 하면, 그들 대부분은 집에서 부담을 느끼고 나온 경우가 많은지라 자학을 하며 “차라리 길에서 죽겠다.”며 버틴다고 한다. 그런 장애인들에게 침낭 두 개를 주고 올 수 밖에 없는 날엔 자신도 자괴감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현재 ‘다시서기센터’에서는 거처가 없어 기초생활수급권을 신청할 수 없는 장애인을 위해 임시주거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다시서기센터’의 모든 활동가들이 노숙장애인들을 자신의 가족 일원으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주소를 만들어주는 것. 그렇게 해서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게 된 장애인들이 꽤 있었다.

이렇게 경기침체로 빈곤 장애인들은 너도 나도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가진 자들을 위한 종부세 완화 정책을 펴 2008년에는 5,443억 원이던 재원이 2009년에는 1,971억 원으로 대폭 줄어들 예정이다.

진정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라면 부자를 위한 감세 정책보다, 그래서 가진 자를 챙기기 보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부터 챙기는 게 우선 아닐까. 추운 겨울 또 다시 얼어 죽는 장애인이 생기지는 않을 지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글/사진 김태현 기자
Posted by 미싱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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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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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특수교사 정원확보 및 장애인교육권 확보를 위해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 설치된 천막 옆에 ‘장애인활동보조예산’, ‘장애인 노동권’, ‘장애인 연금’ 쟁취를 위한 공동행동의 천막이 설치됐다.

천막설치에 앞서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박김영희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우리는 철새다. 해마다 이맘때면 여의도에 낙엽 떨어지는 걸 보면서 투쟁해왔다. 그렇게 수년 동안 삶을 내던진 처절한 투쟁이 있어왔기 때문에 조금씩 바뀌어왔다. 우리가 더욱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머리 하얀 장애인이 부모에게 용돈 받으며 생활해야 하고, 활동보조 시간 조금만 늘려달라고 동사무소에 구걸해야 하는 장애인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집행위원장은 “매번 똑같은 투쟁을 수년간 지속해오니 지겨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것인 이동권, 활동보조서비스, 교육권 등을 요구하는 거고, 이명박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오히려 암울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청와대로 장애인을 초청한다고 장애인의 인권이 향상되는 게 아니다. 정말 장애인 인권을 생각한다면 장애인 예산으로 의지를 보여줘야 할 시기.”라며 “이 땅의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투쟁을 국회와 정부에 알리기 위해 세계장애인의 날인 12월 3일까지 천막농성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경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생활고 때문에 노숙을 선택한 이들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노숙인의 약 80%가 장애가 있다는 한 통계분석에서 알 수 있듯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장애인복지 예산 축소는 생존에 관한 문제이다.

하지만 배고파본 적 없고, 추위에 떨어본 적 없는 이들에게 목숨 건 투쟁에 대한 화답을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일까.
그래서 올 겨울에는 연료비가 없어서 얼어 죽는 장애인도, 굶주림에 시달리다 생활시설을 선택하는 장애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꿈같은 이야기일까.

조금만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Posted by 미싱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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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흑백사진 같은 과거의 풍경은 언제나 ‘과거완료형’으로 규정시키는 게, 2008년 새 정부의 국정운영기조와 맞을 것이다. 가난은 사라졌고 극빈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소비를 통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우리 사회를 윤택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존재하니, 국민의 삶은 ‘7·4·7공약’을 직접 체험할 날도 멀지 않았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왜 신음 차원을 넘어 절망의 절규를 내지르고 있는가? ‘경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라는 구호를 믿었던 국민들은, 이제 ‘내 가족만이라도’라는 숨 막히는 생존 릴레이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가난은 정말 사라졌는가? 국가는 성장 기조를 약속대로 달성할 것인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서민 삶의 변천이 거시적(巨視的)으로 어떻게 진행됐던 건지를, 한국도시연구소 신명호 소장 의견을 통해 들어 본다.


- 한국도시연구소는 언제 설립이 된 건가

1985년에 생겼으니까 20년이 훌쩍 넘었다. 정확히 23년이 되어간다.

- 어떤 목적으로 설립된 건가. 원래의 명칭은 다른 것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도시빈민연구소’였다. 사실 맨 처음에는 그 앞에 ‘천주교’라는 관용어도 붙어 있었다. 그런데 특정 종교를 앞에 붙이는 건 적절치 않다고 해서 뗐고, 그 이후로도 도시빈민연구소라는 이름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94년 전후로 ‘공간환경연구회’라는 소장학자들의 연구 모임과 연계가 되며 변화가 있었다.

- 어떤 지향성을 가진 학자들이었나
주로 진보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는 도시 관련 연구자와 학자들이었는데, 거기 계셨던 분들이 우리 연구소에 깊은 관심을 갖고 부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는 과정 중에 합치자는 얘기가 있어서 연구소 규모가 일정 부분 확대되기도 했다.

법인화를 계기로 해서 명칭을 바꾸고 구성원들도 늘어났다. 그래서 법인을 만들면서 ‘한국도시연구소’가 새롭게 재탄생되었다.

- 도시빈민, 즉 도시에 사는 취약계층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1980년대 초반에 목동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빈민촌의 강제철거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그 강제철거를 기점으로 해서 빈민운동이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철거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시빈민운동이 공식화됐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사회 저변의 활동가들이 현장에 다가가게 됐고, 주민들을 만나며 조직화 작업이 진행됐다. 거의 대부분 세입자들이었다. 당시에는 세입자들에 대한 대책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쫓겨났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세입자 조직을 만들고 싸우면서, 정부에 요구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던 게 바로 그 시점이다.

- 연구소의 설립 시점이 그 시기였나
공식적인 연구소 설립 이전에도, 활동가들의 결집을 위한 모임이 적지 않은 규모로 있었다. 주로 현장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데 모여 대책과 전략을 세우는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우리 연구소의 설립자이신 고(故) 제정구 선생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교육을 하고, 주민들의 의식을 함양시키는 중심체 역할을 먼저 했던 거다. 그러다가 제정구 선생과 같이 활동하셨던 외국인 정일우 신부님이 도시빈민운동의 전략을 연구하는, 또한 운동의 정책을 개발하는 차원의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구소가 현장운동을 지원하는 일종의 전략기지 형태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 그렇다면 초기부터 도시빈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건가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현실 자체가 다른 상황이었다. 명칭은 연구소라 정해졌지만, 실질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미비했다. 왜냐? 당시의 현실이 너무 치열했기에, 현장 중심의 활동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 그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연구소의 정체성 같은 건 어떻게 변했는가
치열한 현장 중심의 활동으로 유지되다가, 80년대 후반과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정한 변환점이 생겼다. 즉, 우리가 나서서 조직을 만들고 교육을 진행하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운동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거민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났다는 거다.
더불어 다른 운동단체들도 여럿 생겨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다. 현장에 직접 개입하는 활동은 이미 각지에서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우리 연구소의 원래 명칭에 맞도록 정책을 우선 연구하고 그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운영 시스템으로 재정립이 된 것이다.

-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재정립했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식의 연구와 조사가 비로소 시작이 됐다.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서, 90년대 들어선 이후부터 연구다운 연구를 진행하게 된 것 같다.

- 연구소 창설이 1985년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도시빈민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파고든 최초의 조직이었다는 의미인가
최초는 아니다. 그 무렵에 빈민운동단체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우리 연구소가 설립되던 와중에도 엇비슷한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었던 거다. 단적인 예로, 천주교 등의 각 종교 내에서 빈민들을 연구하고 지원하는 ‘빈민선교회’ 같은 단체들이 그 무렵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우리 단체(연구소) 이름을 무엇으로 정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었던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도시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도시빈민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런 식으로 ‘도시빈민’이라는 명칭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에, 새로운 호칭의 단어를 생각해 내려 애쓰던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 1970년대에 도시화가 시작되고 80년대에 빈민들의 문제가 등장했는데, 빈민 문제가 대두된 최초의 시점은 사실적으로 1960년대 말이 아니었나

60년대 말부터 70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농촌 인구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됐던 시기가 그때이다. 그런데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살 수 있을 만한 기반시설이라는 게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산동네로 자리를 잡으며, 막노동 같은 일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사람들의 주거지가 ‘빈민촌’이라는 이름으로 형성이 됐던 것이다. 가난한 동네라 하면 곧장 산동네를 연상시키게 된 시점이 바로 그 무렵인 셈이다.

대한민국이 서울 중심으로 재편된 것도 그때부터이다. 전국에서 서울로 몰려와서 산동네 아니면 하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사는 이들로 넘쳐났다.

- ‘재개발’이라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한 게 바로 그 시점이라고 보는 게 맞나
군사정권 시절이 아닌가. 국민의 의견 수렴 같은 과정이 배제된 채로, 일방적인 밀어내기가 시작된 게 그 시절이 맞다. 대표적인 예가 목동 신시가지라는 곳이다. 중산층을 위한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누가 살고 있었는가? 바로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촌이 바로 거기였다는 거다.

그 자리를 일방적으로 모두 철거한 다음, 같은 자리에 등장한 사람들은 아파트 한 채 정도를 구입하고 살 만한 중산층이었다. 양평동도 마찬가지다. 그 이전을 지적한다면 70년대 초 청계천 일대의 대규모 철거를 빼놓을 순 없다. 빈민촌을 도심에서 제거하려는 작업은 이미 그때부터 공식화가 되어 있던 것이다.

- 그 부작용의 시작이 상계동 문제가 아닌가
꼭 상계동은 아니지만, 굳이 언급을 하자면 비운의 주인공이 바로 상계동 사람들이다. 도심에서 철거되며 약간의 외각으로 밀려났던 곳이 상계동이라는 지역이다. 그런데 그 상계동이 제2의 중산층 생활권을 만들기 위한 표적이 되면서, 80년대 들어 또다시 철거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이슈화가 됐던 거다. 도심의 동심원에서 밖으로 밀려나기를 반복하면서, 그 일부는 강남으로 가서 비닐하우스촌(村)을 형성하게 됐다.

강남이 부자들만의 상징은 아니다. 지금도 강남과 송파와 서초 외부 지역으로 떠밀려 그 자리에서 생존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 제정구 선생과 종교적 열정을 가진 여러 활동가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뛰어든 게 빈민운동의 발화점으로 나타나는 건가
제정구 선생은 학생 시절에 청계천을 드나들면서, 야학을 하는 등의 관심을 보이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철거가 진행되니까, 아예 휴학을 하고 거기 안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청계천 인근이 완전하게 철거되니까, 사람들과 같이 양평동으로 이주를 했었다. 그런데 거기마저 또다시 철거가 되니까, 그때는 ‘우리가 마냥 쫓겨 다닐 수 없다!’ 하며 ‘집단이주’라는 시도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이주에 따른 자금지원을 요청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추기경님 말씀이 ‘내가 돈은 없지만 보증은 서 줄 수 있다.’ 해서, 해외 지원을 담당하던 독일의 어느 천주교 단체로부터 자금을 빌려올 수 있게 됐고, 그 지원을 기반으로 시흥의 땅을 사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게 됐던 것이다.

- 그렇다면 신명호 소장님은 어떻게 이 연구소와 결합하시게 된 건가
나는 76학번이고 대학원을 80년에 들어갔다. 1980년… 현대사에서 가장 어수선하던 시절이 아닌가. 그래서 공부를 한다고 앉아 있다는 게 맞는 건가? 하며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전공이 인류학이었는데, 당시 도시인류학 강의를 듣던 와중이었다.
도시인류학 강의 내용은 주로 남미의 판자촌 생활을 주제로 하며 진행이 됐었다. 그때 강의를 하시던 분이 시흥의 철거민 정착 마을과 제정구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관심 있는 사람은 같이 만나 대화를 나눠 보자고 했다.

그래서 몇몇이 모여 제정구 선생을 만나 그 분의 강의를 들었고, 마침 석사학위를 준비하던 내 논문 주제로 시흥시 이주와 마을 형성 과정을 결정하게 되었다.


- 그 만남의 과정이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다. 이후 어떻게 진행이 됐는가

시흥으로 직접 이주를 했다. 그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논문으로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3년 1월이라고 기억된다. 시흥의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직접 ‘당사자’가 된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탐구목표에 대해 직접 들어가 살면서 참여관찰을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몇 달 동안 논문을 쓰기 위한 시도로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됐다. 그래서… 아예 그 곳의 주민이 됐다. 이후 14년 동안 거기에서 살게 된 거다.

- 그렇다면 이 연구소에 23년 동안 집중적으로 관여하며 살아오신 건데, 23년의 과정을 어떻게 회고하며 평가하시는가
솔직히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빠르게 지나갔다는 거다. 지금은 연구 위주의 시스템으로 바뀐 모습이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빈민지역의 산동네 같은 곳에 우리의 활동가들이 널리 퍼져서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살고 있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빈민운동은 ‘주민들과 함께 산다.’는 원칙을 초창기부터 가지고 있었다. 즉, 이론과 실천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는 거다. 초창기 이전의 시점에 빈민운동의 불씨를 놨던 1960년대 선배들이 줄기차게 강조했던 게 그것이었다.

‘주민들하고 같이 산다.’ ‘내가 주민이 되어야 한다.’ ‘활동가 이전에 주민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먼저 강조하셨고, 그러한 원칙을 고수했던 분들이 오래 전부터 많이 계셨다.

우리와 함께 하던 많은 활동가들이 산동네에 들어가서 공부방을 하고 유치원 같은 시스템을 운영했다. 주부들을 위한 모임도 활성화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분야로 일을 했다. 우리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략과 전술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 월례발표회 같은 걸 하면 서울의 모든 활동가들이 한데 모였다. 모두 모여 서로의 얘기를 듣고 토론한 다음, ‘현시점에서 이 문제는 이렇게 대처하는 게 옮은 것 같다.’는 중지가 모이면,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각자의 위치에서 실천하는 방식으로 유기적인 발전 체계를 이루어갔다.

- 연구소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집중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
주택 문제이다. 90년대 이후 중앙 집중적인 운동이 아닌 지역 단위로 결성되는 자발적 조직이 늘어났기에, 연구소의 기능은 오히려 더 지역운동에서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축으로 변화됐다. 그 중심이 주택 문제였다.

- 2000년대 들어선 이후로는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나. 도시빈민이 없어지거나 사라진 게 아니기에, 과거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을 것 같다
IMF 환란을 기점으로 해서 흔히들 얘기하는 건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70년대까지 봤던 것은 절대빈곤이었고 그게 대다수였다. 절대빈곤이라 함은 굶고 헐벗은 생활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계의 빈곤을 의미한다. 그 이후 경제적으로 풍족해졌다고 하지만, 경제위기를 맞고 나서 맞이하게 된 새로운 가난의 모습은 헐벗은 빈곤이 아닌 일자리의 빈곤이다.

즉, 고용의 불안정으로 겪게 되는 또 다른 형태의 빈곤이 엄습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여유 있는 소비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고용의 불안정으로 인한 소득과 소비의 불안에 따라 생활의 질이 급작스럽게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일부에서는 그 현실을 ‘신빈곤’이라 부르기도 한다.

- 연구소에서 주택 문제에 중점을 둔다면, 도시의 빈곤과 관련해서 영구임대아파트 같은 지역을 특히 주목할 것 같다
빈곤층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과거에는 산동네와 하천변이었는데, 그런 데가 없어지고 나서부터는 일반 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나마 빈민들이 밀집된 곳이 임대아파트나 비닐하우스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하 셋방의 숫자도 적지 않다.

요즘은 조그만 단독주택에도 지하를 만들어 세를 주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빈곤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집단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 그렇게 개별화가 된다면, 가난의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늘어날 게 아닌가
공동체가 많이 깨졌다. 산동네 시절에는 그 동네가 하나의 공동체로써의 기능을 담당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이웃이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했는데, 그게 깨지면서 사람들이 흩어지게 됐고, 각자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같은 것만 하더라도, 산동네 시절에는 그 즉시 공론화가 됐다.

어느 집에서 술 마시다가 폭행이 벌어졌다면,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싸움을 말리고 우는 아이들을 데려가서 달래는 등의 일정한 자정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그렇지 않은가. 지하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는 점이 큰 문제인 거다.


- 그렇다면 빈곤 상태에 놓인 개인들에게는 오히려 더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인가

그런 측면이 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과거와 같이 굶거나 헐벗을 정도의 그런 심각한 고통을 요즘은 안 겪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빈곤 양상은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양호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심지어 빈곤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저소득층을 동남아시아의 절대빈곤층과 비교하며, 우리의 빈곤은 빈곤도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억측이고 착각이며 오류일 뿐이다. 빈곤이라는 것은 그렇게 국제비교를 통해 당사자들을 저울질하는 게 아니다. 한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는 게 빈곤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생활비가 유독 많이 들어가는 구조이다. 먹고 사는 데 쓰는 비용이 많다는 거다. 거기에서 1차적인 생활의 차이가 발생한다. 또한 국민적 필수품이 되어버린 휴대전화만 하더라도, 누구는 끊임없이 새 것을 구입하며 소비를 하고 누구는 최소한의 단순 통화만으로 유지하지 않은가.

통신·교통·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유지비용이 발생하는데,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것이 빈곤의 척도이다. 같은 사회 안에서 심리적으로 좌절하는 상황이 누구의 현실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 종부세·양도세를 대폭 완화해서 주택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얘기가 또 나온다.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노리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도시의 틀이 또 바뀌고 과거의 시행착오가 재현될 뿐인 게 아닌가
이 정부 이전부터 서울시가 뉴타운이라는 걸 지정해서 개발하고 있다. 거기서 나타나는 문제는 가난한 세입자들한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은 저렴한 임대주택인데, 그런 주택이 충분하게 공급되지 않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던 문제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는 거다.

그 대목에서 일부 개선된 점이 있다면, 재개발을 할 때 세입자의 권리가 일정 부분 확보됐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무조건 내쫓는 게 아니라, 임대아파트 등을 지어 입주시킨다는 대안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뉴타운 사업의 경우에는 그게 충분치 않다는 게 문제이자 모순점이다.

집을 가지고 있는 주택소유자라 할지라도, 재개발이 들어올 때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액의 자금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 지역 주민들 중에서 가구주라 해도, 거기에 계속 남아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적지 않은 가구가 떠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지 않은가.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있는 외지사람들이 들어와서, 새로 개발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 임대아파트도 주변의 인식에 따라 타의적으로 슬럼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학교까지도 경계를 나누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새로운 슬럼화의 반복이라는 연결고리를 끊을 방법은 없는가
한편에서는 사회적 혼합이라 하면서,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아파트를 섞어 한 단지 안에 짓는 방안을 거론하기도 한다. 아이디어 차원이든 실제 추진이든 뭐든 간에, 물리적 공간을 그렇게 만든다 해서 사람간의 관계가 화합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하드웨어적인 구상이 아닌 의식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우선시하는 것은 경제적 이익이라는 대상이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기존의 다른 가치들을 모두 다 물리치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 때를 보자. 뉴타운 개발 공약을 이구동성으로 외쳤고, 그 공약을 앞세운 이들이 모두 당선되지 않았는가.

사람들의 의식이 가장 큰 문제가 된 거다. 과거에 어려웠다가 어느 정도 풍요로운 삶을 맛보며 지냈다. 그러다가 환란 이후로 일시에 꺾이고 꺼지게 되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안정한 심리 상태로 확대재생산이 된 거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현금, 그것도 목돈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거기에 몰두하려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이 팽배한 상태에서, 어느 한두 가지의 정책으로 국민적 의식과 인식을 하루아침에 돌리기는 극히 어렵다.

그런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그런 틀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게 큰 문제점이다.

- 앞으로도 불안정한 일자리 문제로 인해, 빈곤의 양상이 계속 확산될 거라는 예상이 든다. 더 심화될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지금 다른 해법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전체적으로 본다면 우리 경제 전체의 문제이다. 우리 경제가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을 하지 못하고 저성장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산업구조 자체가 영세기업이나 노동자들한테는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 경제 자체의 경쟁력이 없어진 거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IT 업종 몇 군데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고, 그런 몇몇 기업들이 수출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그들만의 수입으로 끝난다는 점이 사회적으로도 크나큰 문제가 된다. 과거처럼 대기업이 수출로 번 돈이 밑으로 흘러들어가서 일반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향상시키는, 소위 ‘낙수(落水)효과’라는 게 사라졌다.

따로 노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기업의 호황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지도 못하고, 소수의 고급 기술자들만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결국 고용과 실업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IT 산업의 발전은 서민들 입장에선 굉장히 절망적인 구조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어떻게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한 답도 없기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커지기만 한다. 그런데다가 소수를 위한 정책, 다시 말해 고위층과 대기업,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만 쏟아지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서민들한테는 희망이 없어질 뿐인 구조가 된 거다.

- 빈곤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 사회적일자리가 빈곤층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시는가
사회적일자리 제도는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일정 기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생겨나게 하고, 스스로 자활할 수 있는 단계로 나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 희망을 앞세운 측면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부도 자꾸 축소시켜가겠다며, 궁극적으로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포기를 한 것 같다.

반면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는 노동부가 목숨을 걸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기업이다. 기업을 만들면 모두 다 성공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의 틀 안에서 적자생존 해야 하는 별개의 기업인 셈이다. 사회적 기업을 무조건 활성화시키려는 건, 예전 벤처기업 집중 육성 당시와 같은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 확실한 대안과 시원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게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질문 드린다. 한국도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 계획인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문제를 기본적으로 연구해 왔고, 그런 연구 속에서 우리의 존립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 문제에 관심을 높여서, 재활이라든지 사회적기업의 정착 등에 큰 관심을 갖고 나갈 것이다.

또 하나를 더한다면 빈곤의 세습, 다시 말해 빈곤의 대물림 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해나가고 싶다.

대담/이태곤 기자 정리/채지민 객원기자
Posted by 미싱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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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지하철역에서, 옷차림을 보아 노숙을 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한 중증장애인이 쓰레기통을 뒤져 남들이 먹다 버린 커피 컵의 남은 커피를 먹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진 게 없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거기에 나앉은 장애인들의 삶이 급속도로 피폐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 우연히 신문에서 가난한 장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구임대아파트의 임대료 연체율이 30%를 웃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장애인들이 임대료를 못 내면 방이 좁아 웅크리고 잘지언정 찬바람은 막아주었던 공간에서 내쫓길 게 분명한데, 다른 삶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어디로 가지, 라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막 끝난 베이징장애인올림픽 관련 소식을 접하면서는,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 중 선천적인 장애인은 7명에 불과한데, 그 이유가 장애인이 운동에 전념해서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는 산재장애인든 상이군경 장애인든 매달 얼마의 연금을 받는 장애인만 가능하다는 것이어서, 장애인 계층 내부에도 엄연하게 양극화 현상이 존재하고 있고, 결국 장애인이 돈이 없으면 운동도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또 우울했다.

세상이 온통 경제 위기 얘기로 들끓고 있기 때문에 지금 몇 가지 예를 들어 장애인 계층이 처해 있는 암담한 현실을 상기시키는 게 어떤 면에서는 한가로운 얘기를 하는 것으로 비쳐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닥치면 그로 인해 직격탄을 맞고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계층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장애인 계층이기 때문에 이 위기의 시대를 맞아 그간 장애인 운동이 무엇을 놓치고 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펼쳐질 장애인 운동의 기본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제시해 본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난 20년 동안 한국의 장애인 운동은 장애인 관련 법안 제정과 제도 개선에 주력해 왔다. 그 결과 지금 우리나라는 장애인 관련 제도와 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틀을 갖췄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간 장애인 운동이 그 무엇을 간과해 왔다는 것이고, 여기서 그 무엇은 바로 장애인의 기본적인 생존권 보장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다.

거칠게 지적하면 지금 있는 장애인복지법, 고용촉진법,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장애인의 생존권 보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 특히 다른 삶의 수단이 없는 중증장애인 생존권 보장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한 돈으로만 가능하고, 바꿔 말하면 장애연금이 지급되어야 가능하다. 강조하자면 장애연금이 제도개선과 법안 제정에 앞서 장애인 운동의 기본 전제와 목표, 즉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이 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사회참여가 가능하고, 차별을 얘기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부터라도 장애인 운동의 선명한 목표는 장애 연금 쟁취가 되어야 한다.

지금 장애 연금 논의가 정부의 예산이 없다는 논리에 막혀 주춤거리고 있는데, 발칙한 상상력 일지 모르지만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라도 장애계가 반드시 장애 연금을 관철시켜야 하는 것이다.

발칙한 상상력이란 예컨대 정부를 향해, 장애 연금을 지급할 예산이 없다면 현재 기업이 내는 미고용 부담금, 시설에 지원되는 예산, 그밖에 장애인을 위해 지원하고 있는 모든 예산을 모아 우선적으로 장애 연금을 지급하라고 억지라도 부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말을 덧붙여 봐야 사족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현재 중증장애인들에겐 장애 연금 지급이 매우 절실한 사안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중증장애인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려면 최하 매달 50만 원 이상의 장애 연금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정도 액수의 장애 연금 지급은 장애계와 정부가 중증장애인의 생존권 보장에 우선 목표를 둔다면 충분히 가능한 액수의 장애 연금이라고 판단한다.

함께걸음 이태곤 기자
Posted by 미싱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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